길 위에서
1. 설악산 천불동계곡·울산암 초등기 본문
□ 근대등반사Ⅱ-1. 설악산 천불동계곡·울산암 초등기
천불동계곡 초등기(손경석)
1955년 10월 11일, 선발대는 우선 먼저 떠나 현지 군사령부에 등산에 대한 의뢰를 하고 베이스캠프를 설악산 어귀, 지금의 新興寺 옆 雙川계곡에 건설해야만 했다. 후속대가 내일은 곧장 춘천을 거쳐 군트럭을 타고 이 곳에 올 것이니까 천막의 수용능력에 맞추어 세 사람을 1조로 한 각개의 파티로 나누어 오늘부터는 계획된 일정에 따라 설악산을 오르는 길을 위한 갖가지 준비를 마련해 야만 했다. 군단사령부가 가까와지면서 몇 년 전인가 군무에 종사하던 여러 날들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군관계자들과의 협력을 약속 받고 안심하고 숙소를 찾았다.
10월 13일 오전 5시 기상, 군사령관이 보 내준 차를 몰고 다시 사령부로 갔다. 우리의 경비를 맡아 줄 11명의 병사와 2명의 무전병, 2명의 지뢰탐지병이 우리 일행과 합류했다. 杆城을 거쳐 清澗亭으로 오후 9시가 되어서 清潤에 도착······
10월14일, 속초를 거쳐 울산암과 설악의 연봉들을 멀리 보면서 차는 점점 설악의 품속으로 접어든다. 오후 1시10분 인기척 하나 없는 신흥사 앞에 도착, 허물어져 가는 사찰을 볼 사이도 없이 계곡으로 내려가 캠프지를 결정, 식량천막과 장비천막을 치고 난 뒤 파티별 캠프를 건설했다. 캠프지는 울산암이 똑바로 보이는 쌍천계곡 옆 權金城이 남으로 보이는 곳, 옥류와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 줄은 繼祖庵에서 . 또 한 줄은 千佛洞에서부터 흘러내려 때를 타지 않은 청류는 산을 덮고 피어 있는 단풍과 어울려 다시없는 선경의 멋을 지니고 흐르고 있다. 흩어져 있는 가지들을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단한 마음을 달랜다.
10월15일 어제 도착 예정인 후속대가 오늘은 오겠지, 하면서 한가로운 하루를 보냈다. 장비의 재검사, 식량 분류, 부근 루트 정찰 등...... 오후부터는 땀을 흘리면서 일하던 대원들이 셔츠를 말리는가 하면 스켓치에 열중하는 예술파 대원도 있다. 아까부터 사진반은 三脚을 받쳐 놓고 칼라사진 찍기에 바쁜 모양, 계류 옆 단풍잎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혼자 보기에는 아까와, 몰래 거니는 체하며 따놓은 가을 잎사귀를 몇 줄 쓴 편지에 끼워 그에게 부쳤다. 울산암 허리에 곱게 물든 가을 색들, 그리고 끝없이 맑은 가을 하늘에 갈 길 없이 나부끼는 흰구름 몇 줄기, 꼭 어느날 그에게도 보이고 싶은 경치이며 오늘의 마음을 송두리째 전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저녁부터는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어느 계곡 속에서 인지 불어내리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요란하게 흔들고는 다시 조용해진다. 발레리의 「해변의 무덤」이란 시의 일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인다.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얼마나 되었을까. 돌연 검은 먹통 같은 계곡길 저 쪽에서 차소리와 함께 불빛이 캠프 옆 노송을 비추면서 가까이 온다. 「야호오」 본대가 도착했다. 일순, 산의 고요가 떠들썩한 말소리로 뒤범벅되면서 젊은 얼굴, 젊은 소리들이 오가곤 한다. 모두 모였다는 기쁨 축복 「야호오」의 연호.
설악은 좋겠다. 설악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것은 서울대문리대산악회의 울산암 초등이다.
일제강정기 일인 클라이머들의 1937년 봉정암 뒷편의 암봉에서 등반을 한 기록이 있지만 그리 의미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10월 16일 울산암 등반. 울산암 록클라이밍반은 6시에 기상해서 출발. 계류를 따라 '북행하면서 숲을 뚫고 内院庵터를 지나 밀생한 소나무 사이를 올라갔다. 繼祖庵에 이르러 전망은 터지고 멀리 華彩峰, 가까이는 達摩峰, 그리고 조그맣게 雙川 베이스가 보인다.
1峰 바로 아래에 캠프를 치고, 하오 3시20분 1峰 초등반, 1峰에서 능선길로 2峰으로, B, C반은 A반을 보내고 곧 바위 아래 있는 캠프지에 도착, 1峰 아래는 B반이 대기하고 C반은 2峰 아래에 대기하면서 A반을 지원, 만일을 대비해서 연락을 기다렸다. A반의 1봉 등정의 신호를 받고 무전으로 그 기쁨을 베이스에 알려왔다. D반은 나머지 학술반과 베이스에 남아서 현지군과 연락 식 물채집, 사적자료 수집을 위한 답사로 성과를 올리고. 10월 17일, A B반이 합류해서 2봉을 등반, 로프 30미터짜리 세 개, 하켄 , 카라비너 등 어제 1봉에 올라갈 때의 경험에 비춰 여유있는 준비를 갖춘다. 2봉의 첫 핏치는 급한 수직벽에서 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암혈을 거쳐 다시 바위틈에 몸을 가누고 크랙(좁은 바위 틈새)이 수없이 연속되는 거창한 암벽, 언제 나 그러하듯이 바위는 어루만지듯 부드러웁게 선율적으로 움직임을 연속시켜야 한다. 2봉 정상에 선 것이 하오 2시40분경. 10월 18일, 울산암의 3봉 , 4봉 . 5봉을 모두 다 오르고 싶은 모양이지만 조금의 미련은 남겨두는 것이 슬기로운 일이라고 생각되었고 또 前人未踏의 길인 千佛洞 秘境을 뚫고 大青峰으로 가자는 것에 더욱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울산암의 검은 암벽을 흘끔흘끔 뒤돌아보면서 丁庫里 분깃점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가는 길 따라 계곡의 폭은 점점 좁아지면서 逆層의 岩壁과 화강암벽의 암층이 뚜렷이 눈에 띄고 그 가운데를 청류가 분류하면서 곳곳에 소를 만들어 창림을 비추면서 비선대에 이른다. 푸른 노송 가지가 옆으로 뻗은 모습도 한결 비선대다운 절경으로, 표현할 말을 잊은 듯 말소리 하나 없다. 주류인 천불동 계곡을 끼고 조약돌을 아쉽게 흙발로 밟으며 鬼面岩을 지나 좁은 협곡을 거쳐 4시간여, 다음 날을 위해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일찍 쉬었다.
10월 19일 6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도 컴컴한 계곡길을 따라 선발대는 출발했다. 번쩍거리듯이 닳은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는 옥류가 되고 소가 되고 다시 폭포가 된다. 바위에 걸린 紅葉과 黄葉이 그 사이를 둘러 싸면서 여기 천불의 幽谷은 인적을 멀리 하며 전개된다. 폭포가 다섯겹, 그래서 五連瀑이라고 柳교수가 명명한다. 오전 9시에 아침을 파티별로 취사하고 다시 등행길에 나선다. 길은 점점 험하고 단 한 길, 지도와 콤파스로 앞길을 재며 이름 모를 봉을 끼고 돌며 계곡을 넘어 몇 시간, 이 번에는 같은 모양의 봉이 일곱 개가 겹쳐 있다는 봉우리가 보인다. 그래서 7봉폭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대낮에도 햇빛 없는 좁은 골짜기에 접어들었다. 앞길이 막힌다. 두 파티로 나누어 정찰을 한 다음, 다시 출발. 이윽고 천야만야의 절벽길을 가로 질러야만 했다. 그 때 붙인 「文理大트래퍼스(횡단길)」라 불리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10월 20일 6시 기상. 설악에 온 이래 규칙적으로 6시 기상이나 잠꾸러기 J군은 언제나 아침만은 불평 투성이. 일부러 내 천막에 넣어서 5시 30분이면 다른 천막에 앞서 깨우는 내가 몹시 밉겠지만 무뚝뚝한 그는 「잠보」라는 것을 빼놓고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오른팔이다. 정신이 번쩍 들라고 힘차게 불어대는 「호르라기」 금속성이 에누리 없이 6시면 고막을 놀라게 해서 그는 불평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침이다. 우리 파티는 잠꾸러기 J군까지도 벌써 륙크를 꾸린 뒤니까 남의 천막을 두들기는 일뿐, 청명한 날에 5, 6도 가까운 싸늘함, 피를 토하듯이 붉은 단풍도 5색 찬란한 산골짜기도 이젠 볼 수가 없다. 앙상한 낙엽수 가지 사이에 서리 내린 사면은 벌써 초겨울 맛조차 풍겨준다. 9시에 아침을 끝내고 얼마 안가서 첫눈길을 밟게 됐 다. 앞길을 가로 지르는 폭포에도 물기만이 남아 있다. 미끄러지는 듯 한 이끼 낀 바위길은 탈 수가 없다. 나뭇가지만이 잎사귀 없는 고목처럼 바람에 떨고 있다. 나머지 8킬로, 별안간 시야가 터지면서 외설악의 일대 경관이 발아래 굽이친다. 최후 急路를 헤치고 설악산 주봉인 대청봉에 이른 것은 4시 20분, 얇게나마 新雪이 깔려 있고 돌풍이 불어 닥친다. 혼자서는 서 있을 수도 없는 강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고 곧 질듯 한 노을이 내설악 허리에 걸리어 그 노을 속에 태백산맥의 群峰이 멀고 가깝게 굽이굽이 잠긴다. 한국산악회가 두 달 전 내설악에서 이 곳에 올라가 쌓아 놓은 케른(積石), 그 케른에서 登頂의 기쁨을 말없이 주고받았다. 동녘으로 푸른 물굽이 너울거리는 동해의 장엄함, 남쪽으로는 푸른 솔밭이 바다를 이룬 복 받은 땅, 그 땅이 洛山寺 너머로 펼쳐져 있다. 해발 1, 708미터의 대청봉을 등정하고 절정에 이른 대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케른에 산악기를 꽂았다. 그러나 북녘에는 천야만야한 절벽이 겹겹히 겹쳐 있다. 그리운 금강산 절경들은 짙은 구름 속에 아롱져 나의 산길이 애절하다. 여기 주봉으로의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사람의 사는 길이 여러 갈래 있듯이, 주봉길은 고르지 못한 몇 갈래의 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천불동길은 여태껏 등산자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길, 지도에도 물줄기만이 그려져 있던 길을 헤치고 여기 설악의 절정에 소리 없이 섰다.
- 손경석, 〈천불동계곡 초등기〉, 《文理大山岳會 四十年》(1994. 11. 5), pp.1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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