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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수봉 초등자는 한국인 ‘영남 김씨' 였다. 본문

서재의 등반가/근대등반사Ⅱ

2. 인수봉 초등자는 한국인 ‘영남 김씨' 였다.

雪夜小酌 2024. 10. 31. 07:19

□ 근대등반사Ⅱ-2. 인수봉 초등 

 
 

발굴특종

인수봉 초등자는 한국인 ‘영남 김씨' 였다.

- 영국인 아처보다 30년 전 인수봉 오른 기록 발견 

 

본지 5월호에 게재된 영국인 아처의 인수봉 등반보다 30년 먼저 인수봉에 오른 한국인에 관한 기록이 발견됐다. 구한말 법부대신과 참정을 역임했던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의 <유북한기(遊北漢記)>에서 소개하고 있는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료는 근대적인 등반이 도입되기 이전의 인수봉 등반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편집자주>

 
김영복
 

 
신기선의 「양원유집」 가운데 <유북한기>는 그가 47세 되던 1898년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북한산을 둘러보고 지은 글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화계사에서 출발하여 대성문, 대동문을 지나 백운대 밑까지 갔다가 봉성암, 문수사를 거쳐 하산했다. 그리고 산행 도중에 당시 북한산에 파견 나와 있던 관리로부터 그해 인수봉에 올라가서 깃발을 꽂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상세히 기록해 둔 것이다. 이는 1929년 인수봉에 올랐던 영국인 아처(Cliff Hugh Archer)보다 30년 앞선 기록이 된다. 또 신기선의 이 기록은 아처가 인수봉에 오를 목적으로 탐색하기 위해 백운대에 갔을 때 인수봉 꼭대기에 사람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든가 인수봉에 깃발을 꽂은 학생이 있었다는 아처 자신의 기록과 상당 부분 맞아떨어지고 있어 주목 된다. 참고로 신기선에 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 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희조의 아들이다. 신기선은 1877년(고종 14)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교리(校理)를 지내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 문참의를 지냈으나 1886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의 일파였다는 죄로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으로 등용되어 김홍집 내각에서 공부대신, 내부, 법부, 학부 등 각 대신을 역임하고 의정부찬정(議政 府贊政)에 이르렀다.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도 한 인물이다.
 
아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 있어
 
월간 「사람과 山」 95년 5월호에 실린 영국인 아처의 1929년 인수봉 등반 기록(「Some Climbs in Japan and Korea」)은 이이야마와 임무의 1926년 10월 인수봉 2등설 및 아처의 1926년 5월 인수봉 초등설 등 산악계 일부의 주장을 일소에 붙인 매우 중요 한 기록이었다. 그와 같은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명백한 기록이 아니라 이이야마라는 개인의 불확 실한 기억에만 의존한 결과라고 본다.
한편 아처의 기록이 발표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면 과연 한국인으로서 인수봉 초등자는 누구냐' 는 의문을 제기했으며, 여기에 관심이 모아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먼저 '한국인 초등자' 내지는 '한국인으로서 인수봉에 오른 사람'에 관한 언급은 아처 자신이 그의 기록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수봉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드물 뿐 아니라 제각각이라서 쓸만한 게 거의 없다. 전혀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가 하면 별로 어렵지 않은 북쪽 사면으로 사람들이 종종 오른다고 얘기 하는 사람도 있다."
ⓑ"모험심이 강한 학생이 인수봉에 올라가서 금지된 기(태극기:편집자주)를 꽂아 놓았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에 놀란 당국이 인수봉 꼭대기의 기를 내릴 수 없자 원래 올라갔던 학생으로 하여금 다시 올라가 기를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훨씬 더 경솔한 영국 대학생들의 행동을 연상케 하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사실무근인 것같다."
ⓒ"그런데 인수봉을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날 실제로 증명됐다. 내가 백운대 꼭대기에서 인수봉을 연구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인수봉 정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도 나는 그가 어떤 루트로 올라갔는 지 알 길이 없다." 이상은 「사람과 山」 5월호에 발표 된 아처의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 의 "별로 어렵지 않은 북쪽 사면으로 사람들이 종종 오른다"는 부분은 「사람과 山」 10월호에서, 백태흠 씨의 등반을 통해서 증명됐다. 백운대에서 인수봉 정상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와 같은 언급은 실제로 아처 자신이 보고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는 정말로 사실무근일까?, 신기선의 「양원유집」에 실려있는 <유북한기>가 바로 이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삼각산 상봉(上峰)을 인수(仁壽), 그 다음이 백운대(白雲臺), 또 그 다음 벌려있는 세 봉우리는 서쪽의 노적(露積), 동쪽의 용암(龍岩), 중앙의 만장(萬丈 또는 萬景)인데 모두가 천 길 벼랑에 우뚝 서있다. 백운대 는 더욱 수려하게 우뚝 솟았다. 그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끝이 없어 마치 하늘에 오른 것 같다. 이런 까닭에 북한산성을 유람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운대 오름을 무상대승(無上大乘)으로 생각한다.
 

신기선의 《陽園遺集》의 ‘영남 김씨’의 인수봉 등반과 클레멘트
아처의 《Climbs in Japan & Korea》에서 인수봉 등반 언급 부분.

 
 
영남사람 '김씨'가 인수봉 올라
 
28일 (1898년 10월 28일), 같이 간 여러 친구와 천천히 산을 오르는데, 거기 사는 사람으로 순검(巡檢, 지금 의 순경과 비슷한 직책으로 갑오경장 이후에 생긴 경무청 소속 관원)이 된 사람이 앞에서 인도를 하여···(중략) ···순검이 말하기를 전에 놀러온 사람 중에 백운대에 오른 자가 왕왕 있었고 북한산성 안에 사는 사람과 서울 도성에 있는 하인이나 잡역하는 무리들은 (이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마치 평지 가는 듯이 하고 심지어는 독(瓮)을 지고 오르는 자도 있었다 한다. 또 말하기를 인수봉은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어 백운대 오르기보다 두 곱절 힘들기에 옛날부터 그 꼭대기에 오른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금년에 (1898년) 영남(嶺南)에 산다는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있어, 인수봉 밑에 바위로 집을 짓고 영험을 빌며, 종적이 자못 특이했다. (어느 날) 홀연히 인수봉 꼭대기에 붉은 깃발과 흰 깃발 두 개가 꽂혀 있어 사람들이 놀라고' 괴상히 여겼다. 이, 경무청에서 김씨를 잡아다 힐문(詰問)하니, 자기가 그렇게 했다 함으로 빨리 도로 뽑아오라 하였다. 김씨가 벽을 타고 오르는데, 원숭이가 오르는 것 같았다. 혹은 배(腹)로 기고, 혹은 등(背)으로 솟구쳐서 마침내 봉우리 꼭대기에 이르러 기를 뽑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참으로 요상한 사람이었다. 말을 듣고보니 매우 특이하였다. 사람이 굳세고, 파리하고, 용감하고, 겁이 많은 차이가 하늘과 땅 같음으로 탄식하였다. 날이 저물어 동쪽 벼랑을 따라 내려가 봉성암(奉聖菴)을 방문하니 스님은 나가고 대문은 잠겨 있어, 중흥사(重興寺)에 돌아와 묵었다." 위의 인수봉 등반 기록에 나타난 ‘영남의 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1898년 10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인수봉을 아무 등산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인수봉에 올랐다는 막연한 기록 외에는 지금까지 문헌에 나타난 가장 이른 기록이 될 것이다. 신기선 이 순검으로부터 들어서 기록해 두었던 바로 이 내용은 30년이 지난 후 아처가 그의 인수봉 등반 기록 가운데 '누군가 인수봉에 올라가 금지된 기를 꽂았으며 당국이 이를 내리게 했다'라는 내용으로 명백히 언급 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무근일 것이라고 일축한 아처의 주장은 신기선의 기록에 의해서 그렇지 않음이 입증되고 있다.
 
마애불과도 관련되는 인수봉 등반
 
당시 그 사건은 서울 장안에서는 굉장한 뉴스거리였던 것 같다. '김씨'가 인수봉에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순검이 얼마나 침이 마르게 떠들어댔으면 신기선이 그렇게 자세히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이 일은 두고두고 얘기거리가 되어 전해지면서, 30년 후 아처가 들었을 당시에는 사실과는 약간 다르게 전해졌다. 이는 전해지는 동안의 과장과 또 하나는 서투른 통역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인수봉 밑에서 기도하던 '김씨'를 '모험심이 강한 학생'으로 표현한 것이나, 홍기(紅旗), 백기(白旗)를 '금지된 기'로 쓴 것 등이다.
그렇다면 당시 관리들은 왜 기를 내리도록 강요했을까? 시기적으로 보면 동학혁명과 관련지을 수도 있겠지만, 김씨가 인수봉 밑 바위로 집을 짓고 영험을 빌었다(結丁祈靈於峰下)'는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 산」 10월호에 인수봉 남측 여정길 부근에 선각마애불이, 정상에 마애불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음이 밝혀진 바 있다. 특히 남측의 마애불은 당시 동행했던 불교조형연구소 이기선소장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미륵불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김씨'가 새긴 것이며, 영험을 빌던 장소이며, 그가 인수봉을 자유자재로 오를 수 있었다면 꼭대기의 위에 마애불을 새겼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러한 추정은 1898년 당시의 세태와 관계되겠지만 지금도 스님이나 수도자, 또는 전문적인 점술가도 아니면서 예언자적인 말을 하는 사람과 비슷한, 약간은 요술적인 인물이 바로 '김씨' 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흰 깃발, 붉은 깃발이라 운운 하는 것도 신들린 사람들이 요즘에도 보통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치는 집을 가면 지금도 흰 깃발을 걸어두고 있으며, 간혹 색기(色旗)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씨'는 영험을 나름대로 얻은 사람이며, 혹은 동학계통이나 증산 사상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어떻든지 간에 인수봉에 남아있는 미륵불이나 인수봉 정상에 돌탑이 있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앞으로 당시 서울 근교의 토착신앙과 불교 신앙의 모태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다. 지금 북한산에서 인수봉이 특히 유명한 까닭은 바로 암벽 등반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토속적인 바위 신앙이 숨 쉬던 곳이다. 오늘날 인수봉을 찾는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쉽사리 올라갈 수 있는 고독의 길 중간쯤에는 자연 동굴이 하나 있다. 바로 이곳에서 질그릇 파편들이 발견되는 것 역시 인수봉 등반이 예로부터 종교적인 수행 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에밀레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조선시대의 '금강산 비로봉 등반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여튼 아처의 인수봉 등반기가 발표된 이후 인수봉 초등자에 관한 의문과 관심이 신기선의 기록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추후 누군가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이 세상에 알려 지기를 바랄 뿐이다.
 

 
 
*김영복 / 1954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일보에 ‘북한산 천년'을 연재했으며, 우이령보존회 운영위원이다. 현재 인사동에서 문우서림을 경영하고 있다.
 
 
1. 월간 《山》(1995. 12), pp.228-230
2. “순검이 말했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왕왕 운대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 안 주민과 수도의 일꾼들은 마치 평지처럼 오르내리기도 하고. 단지를 메고 올라가는 사람이 있기까지 합니다.’ 또 말했다. ‘인수봉은 백운대보다 두 배가 높아 예로부터 그 꼭대기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올해 영남에서 온 김(金) 아무개라는 사람이 봉우리 밀에 초막을 짓고 기도를 했는데, 그 행적이 기이했습니다. 문득 봉우리에 홍기 백기 두 깃발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여서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경무청에서 김아무개를 잡아 심문해보니 그가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뽑아오라고 명하니 김아무개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데. 마치 원숭이가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엎드려 기기도 하고, 등지고 밀기도 하여. 결국 봉우리 정상에 올라가서 기를 뽑아 내려왔습니다. 마치 나는 것처럼 빠르니, 아마도 기인인 듯했습니다.’ 말을 들고 깜짝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사람이 힘세고 약하고 용감하고 겁이 많기가 이렇게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탄식했다. (巡檢因說前後遊人往往多陟雲臺, 而城內居人及京都隷役輩則升降如平地, 至有擔瓮而登者。又言仁壽峯之高聳削立, 又倍於白雲臺, 自古絶無登其巓 者。今年有嶺南金姓者結广祈靈於峯下, 踪跡殊異。 忽見有紅白旗二面植在峯上, 人皆驚怪。 自警廳拿金詰之, 則乃金所爲也。 督令還拔則金乃攀壁而上, 如狙之登, 或腹而匍, 或背而聳, 竟至峯頂, 拔旗而下。 其疾如飛, 此殆妖人也。 聞甚詑異, 歎人之壯赢勇怯之相懸, 不啻霄壤也。)” - 申箕善·홍승직(역), 〈遊北漢記〉, 《북한산성 유산기》,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2019. 2. 22, p.124
 

《Climbs in Japan &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