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북한산의 바위글씨 본문
■ 바위글씨 1 - 북한산의 바위글씨
북한산의 바위글씨 현황
지역 | 바위글씨 | 조성자 | 조성시기 | 위치 |
동부 | 浮石禁標 부석금표 | 총융청摠戎廳 | 1788.8.20 (영조12) |
구천계곡 초입 |
禁標 금표 | 총융청 | 1788.8.20 (영조12) |
구천계곡 초입 | |
思陵浮石監役畢記 사릉부석감역필기 |
사평 이준 司評 李焌 |
1699.1. (숙종 25) |
구천계곡 초입 | |
九天銀瀑 李伸書 구천은폭 이신서 |
인평대군 이요 麟坪大君 李㴭 |
17c 중반 | 구천계곡 폭포 | |
宮禁塲 궁금장 | 한성부漢城府 | 조선시대 | 보광사 인근 | |
彰□ 宮林塲禁 창□ 궁림장금 | 한성부 | 조선시대 | 도선사 만경폭 | |
彌勒瀑同遊 미륵폭동유 | 조현명趙顯命 외 | 1746 여름 | 도선사 만경폭 | |
李載克, 高□植 이재극,고○식 | 이재극, 고□식 | 도선사 만경폭 | ||
素園 소원 | 최남선崔南善 | 20c 중반 | 우이동 | |
남부 | 김익왕(金益枉) 외 유산명단기 | 김익왕金益枉 등 | 조선시대 | 화계사 옆 계곡 |
烏啄泉 오탁천 | 화계사 내 | |||
甘露水 龍王大神 감로수 용왕대신 | 조선시대 | 내원사 내 | ||
二樂莊 이요장 | 일제강점기 | 정릉 4동 | ||
城底五里定界石標 성저오리정계석표 |
한성부 | 1410.3. (태종 10년) |
정릉4동(국립박물관 이전) | |
東嶺瀑布 동령폭포 | 조선시대 | 평창계곡 상류 | ||
靈泉 영천 | 승가사僧伽寺 | 조선시대 | 승가사 약사전 | |
可養天神 가양천신 | 승가사 | 조선시대 | 승가사 약사전 | |
서부 | 香林洞 향림동 | 불광중학교 뒤편 기독종교시설 내 | ||
우리 겨레의 正氣 | 정재용鄭在容 | 1955.8.22. | 세검정 주추바위 | |
북한산 3.1운동 암각문(고양시 향토문화 제32호) | 정재용 | 1954 이후 | 백운대 정상 | |
을유춘乙酉春 유산명단기 | 권계權啓 등 | 조선시대 | 진과사 옆 계곡 | |
이세환李世煥 유산명단기 | 이세환李世煥 등 | 조선시대 | 진관사 옆 계곡 | |
山城定界 산성정계 | 훈련도감訓鍊都監 | 1720 경 (숙종 46년) |
삼천사 계곡 입구 둘레길 | |
하마(下馬) 바위 | 미상 | 진관사 입구 | ||
迎客 영객 | 미상 | 진관사 입구 | ||
북부 | 고양 효자동 암각문高陽孝子洞 岩刻文: 송시열 각자석 | 구시경具時經 | 1668 경 (현종 9년) |
사기막골 청담 옆 |
淸潭洞 청담동 | 능성綾城 구具씨 | 20c 초 | 사기막골 입구 | |
具家園 구가원 | 능성 구씨 | 20c 초 | 사기막골 청담 옆 | |
정재용鄭在容 바위글씨 | 정재용 | 1958.10. 26 | 인수봉 정상 | |
북한 산성 내 |
산성 수문 축성 기록 | 패장牌將 서상원徐尙遠 |
1711 (숙종 37년) |
북한산성 수구 |
北漢僧徒節目 북한승도절목 |
승군 金아무개 | 1885. 5. (고종 22년) |
산영루 북쪽 바위 | |
禁衛營 금위영 | 조선시대 | 금위영터 | ||
將高 장고 | 조선시대 | 남장대지 | ||
戊 모 | 조선시대 | 북장대지 아래 | ||
卦弓巖 괘궁암 | 조선시대 | 경리청지 | ||
都捴攝聖能永世不忘碑 도총섭성능영세불망비 |
1745 추정 | 산영루 계곡 | ||
捴戎使金公箕錫淸德善政碑 총융사김공기석청덕선정비 |
1844. 7. (光緖 9년) |
산영루 계곡 | ||
金聲根 김성근 | 김성근 | 19c 말 | 산영루 계곡 | |
七遊巖 칠유암 | 서암사 위 계곡 | |||
을미오월(乙未五月) 유산명단기 | 박사한朴師漢 등 | 1739. 5. | 수구, 서암사 엄(广)바위 안쪽 |
|
祥雲洞界 상운동계 | 조선시대 | 상운사 입구 | ||
白雲洞門 백운동문 | 조선시대 | 산영루 계곡 아래 | ||
靑霞洞門 청하동문 | 조선시대 | 부왕사 아래 | ||
紫明海印臺 자명해인대 | 일제강점기 | 의상능선 용출봉 | ||
崔松雪堂 최송설당 | 최송설당 | 1915 봄 | 부왕사 아래 | |
一鵬祈禱處 일붕기도처 | 20c 후반 | 청하동문 옆 | ||
기타 | 扶皇寺 부황사 | 부왕사 | 조선시대 | 부왕사 |
김상궁 마애부도磨崖浮屠 | 1873 (고종 10년) |
도선사 계곡 | ||
표석標石 | 양주군 | 일제강점기 | 사기막골 입구 | |
거북바위 윷판(棋罫) | 홍양호洪良浩 | 1777 후반 | 우이동 도당터 | |
사기막골사지 석주石柱명문 | 고려 이전 | 사기막골 | ||
북한산 인접 지역 |
玉流泉 옥류천 | 17c 말 | 정릉동 정릉 | |
칠성불七星佛 명호名呼 | 조선시대 | 돈암2동 흥천사 | ||
南無山王大神之位 나무산왕대신지위 |
조선시대 | 흥천사 위 | ||
노고산 독재동 추사 필적 암각문(경기 기념물 97호) |
추사 김정희, 이시선李時善 등 | 18c 초~19c 초 | 노고산 독재동 | |
이시선李時善 바위글씨군群 | 이시선 등 | 18c 초 | 노고산 삼하리 |
*조사 시점 : 2015~16
개략하면, 북한산 바위글씨 중에 제일 이른 시기의 것은 정릉동의 성저오리정계석표(城底五里定界石標, 사적 110호)이다. 국립박물관으로 옮기며 설치한 위치 표지석의 유실로, 의미가 상실되어 문화재 지정에서도 해제되었다. 조선시대 전반기로 추정되는 금표가 구천계곡에 전하는데, 구천계곡은 조선시대에 조계동(曹溪洞)으로 불리웠고 왕릉채석장이었다. 도성의 지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채석을 금한 부석금표 2기가 있고 사산금표로 추정되는 금표 2기도 인근에서 발견되었다. 부석금표는 조선왕조실록에 조성 사유와 시기 등이 상세히 전하고 사평(司評) 이준(李焌)이 작성한 사릉부석감역필기는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 석물 제작을 위해 조계동에서 채석 작업을 마치고 기록한 글로, 부석 공역 책임자들의 직위와 이름을 새기었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의 석물 채취 공역 장소의 정확한 위치 확인과 현장에 새겨진 기록물 바위글씨로는 유일한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서는 축성에 공이 큰 도총섭 성능의 공덕문 바위글씨와 연전에 금위영터에서, 국왕 호위 주력부대로 1682년(숙종 8년)에 창설되어 북한산성 축성에 주축이었던 ‘금위영(禁衛營)’바위글씨를 북한산성유적조사위원에서 발견하였고 ‘산성정계(山城定界)’ 는 북한산성 5리 정계 안의 새로운 개간지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주었다는 기록의 정계석이다.
"九天銀瀑 李伸書" - 인평대군의 송계별업
북한산은 조선시대 도성의 주산이고 북한산성이 축성되어 사사로이 거처할 수 없어 누정(樓亭)과 별서(別墅)가 많지 않은데, 산영루山映樓와 산성의 누대(樓臺)를 제외한 사가원림(私家園林)의 누정과 별서로는 구천계곡 인평대군의 송계별업(松溪別業)과 우이동에 우이구곡을 경영했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겸산루(兼山樓)와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의 재간정(在澗亭)이 있고 사기막골 구시경(具時經, 1637년∼1699년)의 서산정사西山精舍와 홍석보(洪錫輔, 1672~1729)의 와운루卧雲樓 그리고 정릉 손가장(孫家莊)의 재간정 (在澗亭)과 고려시대 민지(閔漬, 1248~1326)의 별서가 있었다.
송계별업의 폭포에 쓰연진 구천은폭은 당대의 명필인 이신의 글씨이고 폭포 하단에는 송계별업, 계곡 홍예교에 창벽(蒼壁), 한담(寒潭)을 새겼다고 전한다. 북한산의 비경으로 손꼽히는 사기막골 청담에는 송시열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송시열이 우의정을 사직하고 1668년(현종 9년)에 제자 구시경의 독서당인 서산정사를 방문하여 지은 것을 그 후에 새겼다. 서산정사 위쪽의 와운루 일대의 천석에는 동(洞)의 주인인 홍상한(洪象漢, 1701~1769)이 글씨를 새기지 말라하여 바위글씨를 남기지 않았다. 홍양호가 경영한 우이구곡의 제1곡인 만경폭에는 조현명(趙顯命,1690~1752)의 글씨가 전하며 곡(曲)의 아래쪽으로 유산객의 명단이 새겨진 것도 보인다. 홍양호는 우이구곡에 구곡의 바위에 구곡명을 방석만한 크기로 써놨으며 3년이 지난 후에도 먹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감회를 술회하는 시를 남겼으데, 손자인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바위글씨를 새기려 “이계구곡대자첩(耳溪九曲大字帖)”를 남겼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손가장은 훼손되어 자취를 알 수 없고, 산성 수구 안쪽의 서암사는 원래 고려의 재상인 민지의 별서로 그가 벗들과 함께 노닐던 반석에 칠유암(七遊巖) 글씨가 전하며 수구 가까운 엄(广)바위 안쪽에도 조선시대 박사한(朴師漢) 외 다수의 유산 명단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진관사 옆 계곡의 폭포에는 을유년 봄에 이곳을 유람한 권계(權啓), 이세환(李世煥) 일행의 기록이 있다. 글의 말미에 봉연 법순(奉硯 法淳)의 새김이 있어 시중들던 중들의 노고가 그려진다.
북한산 인접지역인 노고산 삼하리의 이시선(李時善,1625~1715) 바위글씨군群은, 이시선의 글씨로 추정되는 여사천(如斯川)과 고송(高松), 만천 경사독 (滿天 經史讀) 등의 바위글씨가 천변에 있으며 이 바위글씨가 허목(許穆,1595~1682)의 고양산수기(高陽山水記)에 등장하는 서산주인(西山主人)의 거처였는지, 몽재거사(夢齋居士)의 별서가 있던 곳인지는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 못했다.
1. 김윤우, 《북한산 역사지리 (범우고전선 53)》, 범우사, 1995.
2. 《山書》(제26호, 2016), 한국산서회
3.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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