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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인왕제색도의 이춘제 가옥 본문

유산(遊山)과 와유(臥遊)/학천에서 노닐다

인왕제색도의 이춘제 가옥

雪夜小酌 2024. 9. 14. 20:12

인왕제색도의 이춘제 가옥

 

이 글은 김가희의 鄭敾李春躋 家門繪畵 酬應 硏究 : 西園帖을 중심으로논문에서 ‘2. 정선과 이춘제 회화수용중 인왕제색도 관련 부분이다.

 

 

 

그런데 <서원첩> <서원소정도> 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와 지리적 위치가 같아 홍미롭다(18). <서원소정도> 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옥류동과 세심대 사이의 인왕산 자락 아래이다. 서원이 이춘제의 후원이었으므로 <서원소정도> 의 우측 하단에 보이는 기와집은 이춘제의 저택이 될 것이다. 가옥에서 소나무가 다섯 그루 심어진 둔덕으로 이어지는 길은 후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춘제 소유의 모정과 그의 가옥은 기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져있다. 이런 지형적 특징은 <인왕제색도> 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화면 하단의 기와집과 그 뒤에 무리를 이룬 소나무와 담벼락이 중복된다. <옥동척강도> 과 비교해보면 지형적인 위치가 더욱 확실해진다. <옥동척강도> 는 삼각형 모양의 이춘제의 담을 지나 인왕산 골짜기를 등산하여 청풍계로 넘어가는 모임을 그린 것이다. 91) 그림 속 인물들이 열 지어서 있는 골짜기가 <인왕제색도> 의 화면 우측에 둔덕 뒤로 연결된다. 하지만 <인왕제색도> 에는 이춘제 소유의 모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원소정도> 는 둔덕과 나무에 가려진 후원의 배치를 잘 보여줄 수 있도록 '부감시(俯瞰視)'를 이용해 그의 정자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왕제색도> 에는 인왕산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어 이춘제의 정자는 둔덕과 소나무에 가려지게 되고 그 전경에 위치한 이춘제의 가옥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서원소정도> 에는 기와집이 한 채만 그려져 있는데 <인왕제색도> 에는 가옥이 더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인왕제색도> 의 하단의 가옥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이춘제의 소유였다.

 

 

 

<인왕제색도> 에는 이춘제의 저택을 그려져 있는 것일까? 기존의 연구에서는 <인왕제색도> 에 대해 정선의 친구인 이병연이 죽자 정선이 그 슬픈 마음을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근거로 그림 우측 상단에 적힌 '신미년 윤월 하완(辛未年 閏月下浣)'이라 적힌 관서를 들었는데, 이병연이 사망한 것이 529일이기 때문에 이 그림이 이병연이 죽고 나서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 고 하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이병연과 직접 관련되는 모티프라던지 언급이 없는 상황에서 시기적 근거만을 들어 이병연을 위한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 그림의 상당부분이 이춘제 소유지에 할애된 만큼 이병연 보다는 이춘제와 관련한 그림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춘제는 인왕산 아래 위치한 자신의 저택을 정선이 그려준 작품으로 <오이당도> 를 소장하고 있었다. 다음은 '오이당'에 대한 조현명의 시이다.

 

「이태중희 (李台仲熙, 이춘제)는 소당(小堂)을 지었다. 다섯 아들이 독서(讀書)하기 위한 곳이다. 악하(嶽下)에 다섯 기쁨(五怡) 으로 이름이 났다. 시가 있어 차운(次 韻)을 해제하여 보낸다.」 오이당의 편액이 누구에게나 이름이 났다. 악하(嶽下)에서 시편(詩篇)의 뜻을 가히 알 수 있는 곳이다. 목가(木假)의 증봉옹(中峯翁)이 이미 여기에 있다. 여산(廬山)의 열 지은 산봉우리가 이와 같다. 궁상(宮商, 음률)소리가 나와 연이어 읊조리게 되는 곳이다. 반란(斑爛) 한 옷이 가볍게 번갈아가며 춤을 출 때, 흘로 남은 생 흐르는 눈물만 많구나. 가시나무 꽃이 거울 같은 못 한가운데 시들어 멀어졌구나 (괄호 안은 필자)

 

위의 조현명의 시를 통해서 이춘제가 오이당을 축조하게 된 정황을 알 수 있다. 이춘제는 자신의 다섯 아들이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써 오이당을 지었는데, '악하(嶽下)의 오이(五怡)' '큰 산 아래 다섯 가지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소당(小堂) 의 이름을 '오이당'이라고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악하(嶽下)'는 어느 큰 산 아래 를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의 해답은 이춘제가 이병연의 운에 맞춰 <오이당도> 에 제시한 차사천운제오이당도(次槎川韻題五怡堂圖)에서 찾을 수 있다.

 

필운산(弼雲山) 아래는 연기와 안개로 가려졌지만 경물(景物)인 은자(隱者)의 가옥은 의연(依然)하다. 시화(詩書)는 당연히 지금 절보(絶寶)가 되었다. 끝내 꽃으로 팔아버리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춘제의 <오이당도> 에 대한 위의 제시에서 오이당은 필운산 아래 위치해 있고 연기와 안개로 가려져 있지만 가옥만은 의연하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필운산은 즉 인왕산을 가르키는 다른 이름으로 명() 나라 사신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인왕산 아래 오이당이 위치하였다는 것인데, 연기와 안개로 가려진 가운데 의연한 가옥의 모습이라는 서술은 <인왕제색도> 의 조형요소와 너무나 닮아 있다. <오이당도> 에 연기와 안개가 집 주변 산 아래에 흐르게 그렸던 것이 그림의 특징적 성격이었는지 이춘제에 이어 <오이당도> 를 소장하게 된 아들 이창급도 반복하여 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나의 선인(先人)들은 인(仁)이 깊고 덕 (德)이 후하여, 그늘이 감싸는 하나의 집에 구름까지 흐르게 하였다. 늘그막에 선인들이 (인덕을) 생전에 베풀어 후대까지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니, 반폭(半幅)의 장자(障子)가 생각났구나. 어찌 다만 겸재(謙齊) 씨의 그림과 사천(槎川)의 제사(諸詞), 노인들의 제영(題詠)이 희세(希 世)의 보물을 덮겠는가. 백미(白眉)가 있은 후 고약(孤弱)해짐이 더욱 심해져, 백 년의 오랜 기반을 지키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즉 면할 수 없어 쫓아서 꽃과 책을 팔아버릴까 두려워 탄식하기를, 너는 후에 법식을 계속 이어 수장을 생각하며 근심을 이겨 내거라. 대대로 공경하며 지켜서 다른 이의 벽 위의 완(翫)이 되게 하지 마라. 말하니 더욱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종이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구나. 아. 오이당(五怡堂)이 완성 된지가 3기 (三紀, 36년)가 되었다. 신축년 (辛丑年, 1781년) 오이(五怡) 중 아들이 눈물을 닦으며 근서(謹書)하다. (밑줄과 괄호는 필자)

 

이창급에 따르면 <오이당도> 는 산 아래 자리 잡은 집을 그늘이 감싸며 구름이 흐르게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이것들이 다 선조의 은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창급 의 기록은 <오이당도> 에 관해 다양한 추가 정보를 준다. 먼저 <오이당도> 의 크기는 반폭(半幅)으로 된 장자(障子)였다는 점과 정선이 그림을 그렸고, 이와 관련한 이병연과 다른 이들의 제사도 존재하였음을 알려준다. 또 글을 쓴 신축년 즉 1781년에 오이당을 완성한지가 36년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오이당을 지은 해가 1745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춘제 가문은 인왕산 아래 자리잡은 오이당에 대한 소유지 그림을 정선에게 부탁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현대의 감상자들은 <인왕제색도> 를 감상할 때 '농묵쇄찰준(濃墨刷擦峻)'으로 표현된 인왕산의 까만 바위와 비가 개인 대기의 분위기에 먼저 집중하고 대담한 필묵법을 칭송한다. 현대적인 미감이 느껴지는 정선의 표현주의적인 필치 때문에 현대의 감상자들은 인왕산을 먼저 보고, 이 작품을 인왕산을 그린 그림으로 인식 한다. 그렇지만 그림이 그려지던 때 당시 감상자는 인왕산보다는 그 아래 가옥을 먼저 보았다.

 

삼각산 봄 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르름이 그윽한 집 두른다. 주인옹은 아마도 깊은 장막 아래에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상하겠지. 임술년 (1802년) 초여름(4월), 만포(晚圃, 심환지)가 쓰다. (괄호 안은 필자)

 

 

 

위의 제화시(題書詩)는 심환지(沈煥之, 1730-1802)가 쓴 것으로 <인왕제색도> 와 함께 장황되어 있었다(19). <인왕제색도> 를 소장하게 된 심환지는 그림을 본 인상을 제화시로 남겼는데 인왕산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저택 속 주인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각산(三角山)으로부터 온 비구름이 소나무가 둘러싸인 집에 내리고 있고 집 속에 그림과 글을 완상하고 있는 주인에 대한 글을 남기고 있다. 즉 현대인들이 <인왕제색도> 를 감상할 때 인왕산의 표현적인 묵법에 먼저 시선이 가는 것과 달리 18세기 조선인들은 저택을 그린 그림으로써 인식하였던 것이다. <인왕제색도> 는 이춘제의 저택인 '오이당'을 그린 그림이었고 당대인들에게도 저택을 그린 그림으로써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가희, 鄭敾李春躋 家門繪畵 酬應 硏究 : 西園帖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1. p.5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