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유산(遊山)과 와유(臥遊)/학천에서 노닐다 (20)
길 위에서
■ 와유(臥遊) 4 고양산수기 미수암 미수(眉叟) 쉬어간 대암(臺巖) 바위가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대를 이루었다. 1958년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고양(高陽)의 산수를 유람하다가 북한산 진관사계곡 입구에 대(臺)를 이룬 바위에서 쉬면서 산수기를 지었다.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산에서 쉬었다. 골짜기 어귀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면서 이번 여행의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는데, 도중에는 종이와 붓이 없었기 때문에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오래전 맑은 물이 바위를 감싸고 돌아내리던 대(臺) 위는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물은 탁하여 물길 가장자리 바위로 흰 띠를 둘렀다. 마침 길 옆 농원에 붉은 홍매가 피었다.
■ 유산(遊山) 1 불성사를 가는 도중 길을 잃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병오년(1786, 정조10) 봄 노량(鷺梁) 강가에 우거할 때 관악산을 유람하였다. 지금의 자하정 자하 신위의 누정에서 불성사로 가는 도중 길을 잃어 곤란을 겪었는데, 자하정에서 무너미고개를 넘어 좌측 계류를 따라 상류로 오르다 적당한 지점에서 우측으로 마른 계곡을 올라 8봉능선의 4~5봉 사이 고개에 닿아야 하는데, 이 고갯길 초입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고개에 오르면 우측 바위에 불성사를 오가는 고개임을 알리는 “城” 새겨져 있다. “정자를 경유하여 다시 10리쯤 가니 길이 험준하여 말을 탈 수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탔던 말과 마부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가며 칡넝쿨을 뚫고 도랑을 건넜다...
■ 와유(臥遊) 2 학천(鶴天)에서 노닐다 작괘천가에서 노닐다 길을 이어 비래봉(飛來峯) 반구대에 이르렀다. 최신기는 포은(圃隱)을 빌려 이곳에 집청정을 짓고 소요하며 주변의 경관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고 천석명(泉石名)을 바위에 새겼는데, 맞은 편 포은대 바위절벽에 학 그림(畵鶴)과 함께 학소대(鶴巢臺)라 하여 이곳이 선경(仙境)임을 알렸다. 황경원(黃景源, 1709∼1787)은 〈집청정기(集淸亭記)〉에서, "경주(慶州) 남쪽으로 70리에 있는 비래봉(飛來峰)은 고 익양백(益陽伯) 문충(文忠) 정공(鄭公) 몽주(夢周)가 지나가는 길에 노닐었던 곳이다. 봉우리의 높이는 10장인데 평원을 따라서 우뚝하게 치솟았다. 찬 샘이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데 모두 아홉 구비가 듬성듬성 소나무로 이어져 있고 흰 자갈..
■ 와유(臥遊) 1 눈 내린 밤에 술을 조금 마시며 雪夜小酌 이곡(李穀) / 가정집(稼亭集) 세밑이 가까워서야 내린 서설臘近纔呈瑞동온을 보호해 화기를 잃지 않도록冬溫不失和누군가 일찍도 일어났군 뽀드득 신발 소리履聲人起早새가 많이도 남겨 놓았네 꼬부랑 발자국들篆迹鳥留多해묵은 살림살이 남은 것은 서탑뿐舊業餘書榻낚시터로 돌아갈 기약도 허사가 됐네歸期誤釣蓑화로를 낀 사람 하나같이 나그네들擁爐俱是客술 사 올 돈 모자라니 이를 어떡한담奈乏酒錢何 - 이상현(譯), 한국고전종합DB 창경궁 환경전(歡慶殿) 뒷편